Yehyang IT Yehyang IT

너, 내 동료가 돼라!

2025년 8월 30일. 파릇파릇한 대파처럼 청량한 오늘, 여름성경학교를 위해 고생하신 모든 분들을 위한 뒤풀이 모임이 열렸습니다.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기상청은 “토요일엔 비”라는, 듣는 사람의 의욕을 단번에 꺾는 예보를 내놨습니다. 하지만 정작 오늘 하늘은 그런 엄포 따위는 기억조차 못 한 듯 파랗게 열려 있었습니다. 

다들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니, 여름성경학교가 떠오릅니다. 그때 우리는 아이들을 섬긴다며 사실상 체력 단련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 같이 웃으며 회상하다 보니, 그 고생도 어느새 "은혜로운 추억"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나타납니다. 이쯤 되면 인간의 망각 능력은 가히 성령의 은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합니다.

파티에 음식이 빠질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고기, 그리고 그 고기를 위해 먼저 치러야 할 의식은 석탄에 불을 붙이는 일입니다. 불쏘시개를 넣고 불꽃이 사라질 때까지 연기를 쐬며 앉아 있는 동안, 우리는 마치 작은 제단 앞에 앉은 제사장 같았습니다. 레위기의 말씀처럼 “불은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를 떠올리며, 다소 하찮은 일회용 종이 접시로 바람을 막아가며 불을 지켰지요. 그러다 보니 문득 불을 몰랐던 시절의 인류가 생각났습니다. 날고기를 씹으며 얼마나 화가 많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시대에 태어나 구운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와 기쁨이 새삼 밀려옵니다.

석탄에 불이 고르게 붙으면 이제 본격적인 시작입니다. 정성으로 준비된 고기를 마치 도미노 쌓듯 조심스럽지만 신속한 몸짓으로 그릴 위에 올립니다. 이렇게 고기를 굽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기 시작합니다. 아까 연기를 뒤집어 쓰면서 석탄에 불을 붙일 때 누구 하나 관심을 주지 않더니, 사뭇 다른 풍경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때를 놓치지 않습니다. 양팔을 걷고, 최대한 근엄한 표정으로 고기를 굽기 시작합니다. 잔뜩 생색 낼 수 있는 드문 기회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영광의 시간은 짧고도 짧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충분히 먹고, 더 이상 고기 굽는 광경에 감탄하지 않는 기류가 감지되면 저는 다른 이에게 집게를 넘기고 그림자처럼 쓰윽 빠집니다.

아아… 기회주의자의 삶이란, 이렇게 허무하고도 추악한 몸짓의 연속입니다..

이렇게 고도의 고기 굽기가 이어지다 보면, 마침내 이상적인 굽기의 고기가 완성됩니다. 집게에서 접시로 옮겨지는 순간 이미 절반은 향기에 취해있지요. 준비해주신 반찬과 함께라면 더 이상 레스토랑의 미슐랭 별도, 호텔 뷔페의 호화도 부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지난날, 온 부엌에 기름을 튀기며 혼자 서 고기를 굽던 쓸쓸함이 말끔히 사라집니다.

우리는 젓가락을 들고 정중하게 시작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선 거의 전투입니다. 고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빈 접시만이 전장의 흔적처럼 남습니다. 누군가는 상추쌈을 예술 작품처럼 정성껏 싸고, 누군가는 그냥 고기만 연속으로 집어 넣습니다. 결국 이 순간 모두가 깨닫습니다. 고기는 고민하지 말고, 그냥 빨리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치열했던 고기 먹기가 끝이 났습니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두가 배가 터질 듯 허리를 두드리며 “이제 그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고기를 먹고도 멈추지 않는 종족입니다. 우리는 곧바로 마시멜로우라는 새로운 단계에 들어갔습니다.

대체 인간은 왜 이렇게 먹는 걸까요? 먹기 위해 사는 것입니까, 사는 김에 먹는 것입니까? 고기를 그토록 집어삼킨 뒤에도 불 위에서 하얗게 녹아내리는 마시멜로우를 바라보면, 우리는 다시 젓가락을 듭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마시멜로우란 결국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서 잠시 흔들리다, 입 안에서 소멸하는 연약한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이렇게 중얼거리게 됩니다.

“아아… 이것이야말로 人生이지 않겠는가.”

마시멜로우까지 먹으니 배가 너무 불렀습니다. 단 것을 들이부으니 혈당 스파이크가 치솟아 가만히 앉아 있지를 못하겠더군요. 그래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산책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문제는 그 길이 단순한 평지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낮 햇살 아래,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생각보다 가파른 오르막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산책”이라 부르던 그 길이, 몇 걸음 지나자 곧 “등산”이라는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땀방울이 이마에 맺히고, 누군가는 숨을 헐떡이며 “소화만 하려 했는데 왜 이러냐”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단순한 산책인이 아니었습니다. 발걸음이 하나로 맞춰지고, 함께 오르내리는 그 짧은 시간이 모험처럼 느껴졌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여정을 앞둔 선원들처럼 걸음을 맞추어 나아갔습니다. 마침내 아무도 낙오하지 않고 목적지까지 도착한 우리는 마치 복숭아나무 아래에서 도원결의를 맺었던 옛 나그네들처럼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배부른 몸을 이끌고 걷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고기와 마시멜로우, 그리고 함께한 이 산책이 하나로 이어지자, 짧은 하루가 마치 한 편의 모험담처럼 완성되어 가는 듯했습니다.

결국 우리가 얻은 것은 배부름과 약간의 근육통, 그리고 사진 몇 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오늘 하루는 충분히 값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번 모임은 단순히 고기를 구워 먹고 산책을 한 날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여름성경학교를 위해 함께 땀 흘리며 애써주신 모든 분들이 한자리에 모여, 다시 웃고, 다시 먹고, 다시 걸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흘렸던 땀이 이제는 우리의 웃음으로 환원되고, 그 기억이 사진 속에 새겨졌습니다.

고기와 마시멜로우, 그리고 짧은 산책. 별것 아닌 일상의 조각들이 모여, 여름성경학교 뒤풀이란 이름의 잔치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은혜는 때때로 이렇게 소박한 만남 속에서, 배부름과 웃음 속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주일학교 교사, 백민규)

Read More
Yehyang IT Yehyang IT

케이크, 전선, 식탁보 그리고 주일학교

2025년 8월 24일, 여느 때와 다름없는 싱그러운 주일 아침입니다. 주일학교는 오후 1시 30분에 시작하지만, 선생님들은 12시 30분까지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십니다. 저는 오늘 정확히 12시 30분에 버스를 탔습니다. 시간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모범적인 선생님이 되기에는 이미 글렀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그러나 늦지 않으려고 버스에서 내릴 때 거의 달리기 선수처럼 뛰어가는 제 모습을 보며, ‘신앙은 때로 육체의 훈련과도 같다’라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제 8월의 정점입니다. 그런데 여름은 마치 놀리듯 잠깐 얼굴만 비추고 곧장 사라져버렸습니다. 덕분에 한낮인데도 쌀쌀한 공기를 마주합니다. 높고 푸른 하늘 아래, 햇빛을 한껏 받아 반짝이는 교회 건물이 오늘따라 조금 더 예뻐 보입니다. 건물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아마도 제가 ‘많이 늦지는 않았다’는 자기 위안으로 눈까지 밝아진 탓일 것입니다. 인간은 이토록 쉽게 착시를 만듭니다.

12시 42분, 교회에 도착했습니다. 이 시간 교회는 고요합니다. 그러나 그 고요함 속에서 부지런한 선생님들은 이미 분주히 움직이고 계십니다. 교실을 준비하고 찬양 율동을 맞춰보는 모습은 다가오는 아이들과의 전투를 앞둔 군인의 예행연습처럼 보입니다. 사실 주일학교에서 율동은 단순한 몸짓이 아니라 일종의 능력입니다. 마치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갖추어야 하는 스펙처럼, 주일학교 선생님에게는 율동이 곧 경쟁력이 됩니다.

저는 아직 그 능력이 부족합니다. 오른손과 왼손이 따로 놀고, 웃어야 할 타이밍에 표정이 굳어버리곤 합니다. 만약 주일학교에 인사팀이 존재한다면, 저는 아마 ‘율동 역량 미달’이라는 평가를 받고 탈락했을지도 모릅니다. 다행히도 교회는 회사가 아니고, 아이들은 채용심사위원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용케 살아남아 또다시 율동을 배웁니다.

스피커를 연결하고, 피아노를 맞추고, 이름 모를 장비들을 세팅하다 보면 주일학교는 차츰 깨어납니다. 그러나 전선은 왜 이리도 자주 꼬이는 것일까요. 한쪽을 풀면 다른 쪽이 매듭지고, 다시 풀면 또 다른 쪽이 얽힙니다. 저는 그 순간 문득 깨닫습니다. “아, 이것이 바로 人生이구나…” 아이들이 들어오기 전, 이미 우리는 전선을 매만지며 또 하나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게 선생님들이 전선과 씨름하며 인생을 성찰하는 동안, 주일학교 교실은 하나둘씩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삐걱거리는 문을 밀고 들어오는 아이들의 발걸음은, 마치 교회가 본격적으로 ‘호흡’을 시작하는 신호음 같습니다. 1시가 되었습니다. 이제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우리는 전도사님께서 준비해두신 케이크를 나눠 먹습니다. 치즈케이크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종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입 안에 들어가는 순간, 이름은 사라지고 단맛만이 남기 때문이죠. 사실 이 순간은 작은 특권입니다. 아이들이 교실을 장악하기 전, 선생님들만이 누릴 수 있는 은밀한 휴식이지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요. 오늘은 제가 주일학교를 시작한 이래 가장 적은 수의 친구들이 모였습니다. 방학의 마지막 주간이라 그런지, 아이들은 아직 집에서 케이크 같은 달콤한 방학의 끝맛을 핥아먹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적다고 해서 예배가 줄어드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아이가 적을수록 선생님들의 열정은 더 폭발합니다. 세 명의 아이들을 앞에 두고 선생님들이 열심히 합을 맞추어 율동을 추는 광경은…  거의 서커스에 가깝습니다.  아이들이 깔깔 웃으며 따라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꼭 그렇게 흘러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힘을 내어 점프하고 손발을 흔듭니다. 그 순간 주일학교에서 가장 즐거운 이는 아이들이 아니라 사실 우리 자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격동적인 몸짓이 끝나면 선생님의 기도가 이어지고, 이윽고 전도사님의 설교 말씀이 시작됩니다. 아이들은 말씀을 들으며 잠시 집중하다가도 금세 서로를 툭툭 건드리곤 하지요. 그러나 오늘은 달랐습니다. 전도사님께서 갑자기 식탁보를 덮어쓰고 단숨에 룻으로 변신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뮤지컬을 보는 듯한 광경입니다.

식탁보를 덮어쓰고 룻으로 변신한 전도사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선생님들은 순식간에 감정에 휩쓸렸습니다. 누군가는 눈시울이 붉어졌고, 누군가는 주먹을 움켜쥐며 결심했습니다. 제 옆에 있던 선생님은 차마 떨어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래, 우리도 저렇게 해야 한다.” 우리는 다시 한번 심장을 불태웠습니다.

설교 말씀이 끝나면 우리는 곧장 공과 시간으로 들어갑니다. 공과는 그날의 설교 말씀을 바탕으로 진행되기에, 아이들과 함께 다시금 되새기며 성경 말씀을 조금 더 가까이 느낄 수 있습니다. 아직 한글을 완전히 익히지 못한 친구들을 도와주면서, 우리는 발걸음을 맞추어 함께 앞으로 나아갑니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해도 어쩐지 진실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 한마디에 제가 오히려 당혹스러워지곤 합니다. 그러나 그 당혹스러움 속에서, 우리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 함께 배우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주일학교란 무엇일까요. 아이들이 배우는 자리인 동시에, 어른들이 자신을 돌아보는 자리. 설탕 같은 순간과 소금 같은 시간이 뒤섞이는 자리. 그리고 때때로 식탁보 하나가 무대를 바꾸어 놓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주일학교란 무엇일까요? 정의하려는 순간 이미 늦어버린 곳입니다.

(주일학교 교사, 백민규)

Read More